오전 9:48
엄마 : 잘 잤니~~
오후 1:02
엄마 : 아직도 자니~~
오후 3:25
나 : 인났오
오후 3:31
엄마 : 우오오~ 푹 잤니 간만에?
최근 엄마와 서로 안부를 묻는 일이 늘었다. 잘 잤는지, 꿈자리는 어땠는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낼 예정인지, 아니면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덩달아 나도 친구들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페이스타임을 걸어 하늘을 보여준다. 하늘을 보여주겠다는 핑계로 친구들의 얼굴을 확인한다. 내가 잘 자는 만큼 친구들도 잘 잤으면 좋겠고, 내가 오늘 너무 예쁜 하늘을 본 만큼 친구들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으면 좋겠다. 세상에 안부를 물을 요소들이 너무 많다. 오늘 하늘은 봤니, 밥은 먹었니,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새로운 소식은 없니, 아침은 챙겨 먹었니.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방식이 이렇게나 많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메일이 왔다. 아래 메일 일부를 무단으로 인용한다. 미리 친구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그래도 누가 보낸 것인지 밝히지는 않았으니 화내지 않기를.
별 다른 긴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돌아가서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었는데 가끔 계획했던 걸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들 때가 있잖아? 대부분의 경우 참는 것이 이로웠긴 한데 오늘 한 번은 참지 않아 보려고 해, 하하.
참지 않아 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마침 나에겐 누군가의 포옹이 필요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포옹받은 만큼 남들에게도 그 포옹을 돌려준다. 프리 허그 타임! 오늘만큼은 참지 않아도 돼요!
*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그동안 가고 싶었던 예약제 서점에 방문했다. 그 곳에서 운명처럼 조우한 책의 시가 가슴 깊이 남아 일부를 인용한다.
꿈에서 넌 아주 바빴다
호랑이랑 싸우고 있었다
네가 손을 휘둘러 호랑이를 때릴라치면 호랑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너의 등뒤로 나타나 네 목을 졸랐다
모든 것을 지켜보며 나는 울고 있었고
울기만 한 건 아니고 너의 행복을 빌었고
그러니까 네가 분양받은 아파트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듯한 잡곡밥 지어 먹고 생일날에는 한가득 축하받는 그런 삶을 살기를, 부디 호랑이 따위는 다 잊고 죽을 때까지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아프지 말고 잘 살기를
그러니까 어서 그 꿈에서 깨기를, 깨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할 이 꿈이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어지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비밀번호를 틀렸다
꿈이 끝나지를 않았다
호랑이가 커다랗게 하품을 하자 너는 사백 살 먹은 은행나무에 날아가 박혔다 그런 너를 구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계속 울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러니까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이건
꿈이야
우리가 하루이틀 망하니
모두가 너를 떠나도 나는,
나만은 네 곁에 있을 거야 알지?
하지만 사실 나 그때 말이야
네가 미웠어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하세요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
비밀번호를 다시
꿈이 끝나지를 않았다
내가 잊어버린 것
네가 잊어버린 것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크길래
이 꿈에서 깰 방법이 없는 걸까
노란 은행잎이 사방으로 날린다
그렇담 가을인가 꿈꾸기 전엔 겨울이었는데
왜 꿈에서도 계속 눈물이 흐르고
그렇담 너는 이제 여기 없다는 걸까
잠시 시대의 어지러움으로부터 그대의 눈과 귀를 돌려라*
너는 그런 구절들을 외웠다가 적당한 때에 속삭여주던 사람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에게 필요했던 건
마주볼 수 있는 눈과 귀였지
너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나를 서서히 망쳤고
나도 사실은 너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나 두려웠지
안전하고 무해한 것들만 믿으며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채
그러니까 호랑이는 어린 내가 좋아하던 동물
검정 방울뱀은 신비롭고 지리산 반달가슴곰은 귀엽고 자바공작새를 보러 서울대공원도 다녀왔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건
천진하게도 썩은 동아줄을 믿고
죽어서는 가죽을 남기는 동화 속 호랑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던 조선 호랑이
어라? 울던 나는 고개를 들고
옆에서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호랑이를 본다
이 꿈엔 더 이상 네가 없고
다시 아름다워지기 위해
나는 너를 찾아야 한다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하세요
콩떡 가래떡 망개떡 수수팥떡 온갖 떡들 모아들고
호랑이 뒤로 천천히 다가간다
*
눈을 떴을 땐
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꿈을 꾼 거야?
응
무슨 꿈?
오색찬란한 꿈
언제나처럼 너는 나를 꼭 안아주었고
나는 두 팔을 네 목덜미로 가져갔다
*잉게 숄, 「잠시」.
- 한여진, 「초기화」,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서로를 서서히 망치는 관계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사랑의 무한함과 무결함을 무한히 믿었던 때가 있었다. 사랑이면 다 해결된다고, 사랑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그러니까 우리 모두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다니던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랑의 힘, 운명적인 사랑, 사랑의 무결함 따위 믿지 않는다. 어디에나 불결함은 존재하고 의도치 않게 서로를 좀먹는 관계 또한 존재한다. 끊임없는 대화의 시도는 돌아오지 않을 화살의 반복. 타의로 버린 의지는 새로이 발견한 정답.
“결국 쓴다는 것은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가진 지극히 단순한 낱말 속에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소리와 의미를 다시 새롭게 겹쳐 새겨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 이제니, <새벽과 음악>
사랑에서 온전히 긍정적인 의미만을 찾았던 나는 이제 사랑이란 단어에서 나만이 끌어안을 수 있는 고유한 슬픔을 발견했다. 그 슬픔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서 어디 내놓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비밀 얘기하듯이 속삭이기도 부끄럽다.
그러니까 본가에 머물던 며칠간 엄마가 자기 전 내게 속삭이던 사랑에도 엄마만의 슬픔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엄마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도 사랑해- 하고 답했던 순간에 나도 내가 삼켜야 했던 슬픔이 있었다. 엄마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속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슬픔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나는 그 시절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유 모를 애정과 …를 느낀다. 괜히 심술을 부려 보고 싶기도 하다. 야, 너 그거 얼마 안 가. 너는 곧 질투가 뭔지 깨닫게 될 거고, 동생을 미워하게 될 거고, 동시에 동생을 너무나도 사랑하게 될 거고, 소외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고, 유대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게 될 거야…
그치만 그럼에도 너는 사랑을 할 테지.
검정치마의 『Teen Troubles』 앨범의 「Flying bobs」에 그런 가사가 나온다.
만약에 그때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난 당장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같은 실수들을 또 다시 반복하겠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전부 다 내가 원했던 거예요
이 모든 게 다 내가 원했던 거라구요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나를 서서히 망쳤던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가 과연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했던 선택과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아니, 아니다.
나는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이유로 아파했을 것이고 또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를 망치는 선택이더라도….
그래 사실은 나도 두려웠다. 나만이 홀로 무너져내려가고 있는 것이라면 괜찮았겠지만 나로 인해 너가, 당신이, 너희들이 모두 괴로울까봐. 그게 온전히 내 탓일까봐. 그리고 너는, 너희는,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내 탓을 하지 않고 그저 내 곁에 남아 있을까봐.
사랑이 뭐라고,
*
말이 길었다.
그냥,
사랑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나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겠습니다.
그게 결국 우리를 좀먹더라도….
오색찬란한 꿈을 꾸면서….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