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금 후회만을 곱씹으며 사랑합니다
이번 생일엔 책 선물을 정말 많이 받았다.
그 중 마음에 들었던 시집의 시를 인용하며 글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돌아온 이 여름날에는 탁한 물내음만이 맴돌고 있네요
강가에서 비춰진 향기도 온몸에 스며든 태양빛마저 내겐 비극이었기에
맴도는 사계는 제자리만을 반복하고
나는 다시금 후회만을 곱씹으며 사랑합니다
차정은, 99
*
시에 빠진 계기가 있다. 친구들이 나에게 선물로 시집을 건네도 시큰둥했던 시기가 있었고, 누군가 내 생일 편지에 시를 인용해도 음, 그렇군. 하고 넘어갔던 내가 어느 순간 열렬히 시를 찾고 찾아읽게 된 계기가.
사실 모든 것은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 하마터면 내 올해 졸업 전시의 테마가 될 뻔했던 <사랑>은 세상 모든 행위의 이유이자 변명이 된다. 왜 그러셨어요? 사랑해서요. 이 한 마디면 그 행위의 결괏값이 한순간에 로맨틱해지기도, 또는 혐오스러워지기도 한다. 이런 곳에 사랑을 대입하다니, 저 사람은 참 로맨틱하구나. 라는 평을 받기도 하고, 그딴 이유로 사랑을 가져오다니, 뻔뻔스럽기도 하지! 라는 반응을 얻기도 한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시에 왜 빠지게 되셨어요? 하고 묻는다면.
사랑 때문에요.
하고 답하겠다.
(대상은 굳이 명확히 하지 않을) 사랑 때문에 시작하게 된 일이 너무도 많다. 난데없는 크루저 보드 타기, 밤에 음악을 틀으며 크래커 씹어 먹기, 가벼운 술 한 잔, 일기 쓰기, 커피 마시기, 글을 쓰기 등등... (명확하지 않은 대상을 향한) 사랑은 나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엄마를 향한) 사랑 때문,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첫사랑을 향한) 사랑 때문, ... ... 시를 사랑하게 되고,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의 시작은, 최승자의 시를 접하고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지난 회차의 관계에 대한 갈망과 절망에 대한 글도 모두 최승자의 시를 읽고 느낀 것에 대해 쓴 글을 바탕으로 쓴 것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속을 대변해주는 것 같은 시. 그리고 자꾸만 나의 마음을 간질간질 관통하는 시.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최승자의 시는 이제 저켠에 두게 되었고 대신에 나는 박준의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박준의 시 중 제일 인상 깊게 읽은 시 한 편을 인용한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누군가(엄마)가 내게 말했다. 혜빈아, 지금까지의 삶의 패러다임을 바꿔봐야 해.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찾아야 그것에 맞춰 네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 너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책을 읽고, 자기 자신에 집중해 봐.
엄마 그럼 나는 나랑 백 번 대화해야 돼요.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해야지.
그래서 그 첫 번째 대화 시도의 증인으로서 박준을 모셔온다.
안녕하십니까, 박준 선생님. 제 1회 안혜빈의 내적 자아와의 대화에 와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임을 녹온을 쓰면서 깨달아왔다. 글에서 보이는 태도와 삶의 태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얄팍함이 금방 드러난다는 것 또한. 왜냐하면 내가 그랬으니까. 나는 내가 쓰는 글과 삶의 결이 맞닿아 있는 사람인가? 잘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 내 글과 내 삶에 대한 구체적인 피드백을 들을 결이 없었다. 그저 마감에 급급해 매주 글을 쳐 내며 이번 글 괜찮았어? 어땠어? 하고 찌질하게 친구들의 반응을 묻고 그 답변을 기다릴 뿐...
면전에 대고 네 글 거지같아, 라고 신랄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내 글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눈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시야를 키우기 위해 애쓴다. 매번 충동적인 감정에 시달리며 그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을 따르기 때문에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적어도 시도는 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박준의 책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줬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최승자의 시만이 전부였던 나의 삶에 또다른 파고들 만한 옵션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선방한 것 같다. 책을 읽다가 가끔 드는 생각인데, 나는 남들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책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 않는다. 예전에 좋아했던(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절필하기를 바라는) 작가가 영화를 보는 행위에 대고 사실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콜라를 보는 것 아닐까, 하고 비유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사실 우리는 활자가 아니라 활자 사이의 공백을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머릿속에 남는 것은 활자가 아니라 그 활자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에 가까운 무언가니까.... 타이틀과 몇 줄의 글자, 전체적인 줄거리 말고 적확한 한 줄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의 표현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 우리는 무얼 읽고 무엇에 깨달음을 얻는가...
서문에서 차정은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했다. 이번 챕터의 제목이기도 한 구절을 인용하며...‘나는 다시금 후회만을 곱씹으며 사랑합니다’....
김사월의 앨범, <디폴트>에 수록된 ‘디폴트’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
그래서 매번 기뻐해야지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
그때 참 맛있게 받아야지
이 노래를 처음 들을 때만 해도, 노래가 참 좋다고, 그와 동시에 그러나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라는 입장엔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땐 세상이 막 핑크빛이고 그랬던 게 아니라 그냥, 세상에 조금의 기대를 더 걸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 가사에 깊이 공감한다.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값인 만큼 우리네 사랑은 하나하나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것이니 맛있게 받아야 한다고. 우리의 사랑은 모두 누군가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랑이 벅찰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져서, ...
오늘 사주를 보고 왔는데, 나는 기브 앤 테이크가 안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너무너무 좋아해서 무언가를 주거나, 마음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내게 돌아오는 게 없을 거라고. 그러니 너는 누군가에게 너의 것을 내어 줄 때 절대 무언가 돌려받을 기대를 하지 말거나, 그게 싫다면 애초에 너의 것을 내주지 말라고. 역술가 아저씨는 볼펜을 탁탁 휘둘러 가며 ‘말거나’, ‘말라고’에 악센트를 줬다. 원맨쇼에 가까운 아저씨의 말에 기운없이 웃으면서(너무 쇼맨쉽이 강해서 리액션을 할 힘이 없었다) 속으로 차정은의 시를 되뇌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후회하며 사랑할래요....사랑의 증명 혹은 보답이 꼭 물질적인 것으로 치환될 필요는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