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마다 저는 제가 참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프로그램을 키고 하얀 바탕의 깜빡이는 커서를 마주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생각은 둔해집니다. 분명히 창을 키기 전까지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글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곧 그것은 온데간데없고 날것의 저만 존재하게 됩니다. 발가벗겨진 느낌이 듭니다. 이 느낌이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오늘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너무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 같아 몇 문단을 썼다가 지웠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딱히 감흥도 없는 일에 억지로 감정을 불어넣어서 인위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을 써내려갑니다.
...
가끔 제 팬티 속엔 너무 많은 것들이 쉽게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뜨겁고 단단한 것들은 쉽게 뚫고 들어가 이웃집 민지의 마음이나 하은이의 하은이에 대한 사랑, 그 때 본 흑인 남자의 좆 같은 것들. 팬티 속으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들은 나를 축축이 적시고 나는 하얗고 단단한 것들을 상상하며 자위를 해 하얗고 깨끗한 것들을 마냥 더럽히고 싶어
더럽·히고 싶어,
나처럼
하은이는 나에게 스스로를 좀 사랑해 보라고 말했는데 나는 자기연민 따위 하기 싫어서 발에 채이는 것들을 차고 계엄령이 떨어져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길거리를 혼자 성큼성큼 걸으며 공상에 젖는 나에게 취하며
더럽·히고 싶어,
나처럼
아랫집 오빠는 오늘도 음악 소리 쿵쿵 나는 고양이와 손을 잡고 왈츠를 추었지 이건 전 애인의 유산이니까, 응 그럼 아직 그를 그리워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고 싶어 머릿속에 떠다니는 잔상들을 해소하고 싶어 훌라춤을 추면서,
해소·하고 싶어
떠오르는 태양 같은 것들
내 눈을 찌르는 것들 때문에 눈물이 나
눈물이 날 때면 꼭 ( )를 찾아
[ ] 가슴팍에 안기는 소년들처럼
존재론적인 사랑에 마냥 파묻히고 싶어
팬티 속으로 들어간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고 싶어 그 때 그 여자애의 달뜬 숨과 그 남자애의 비밀과 그 선생님의 위로와 그 전 애인의 음악 같은 것들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
공모한 시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 결국 인용하고 말았습니다. 존재론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래도 제겐 그것이 많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같은 사랑을 다른 대상들에게 갈구하고 있습니다. 제 속옷 속에 들어온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봅니다. 나의 아랫배에 묵직이도 자리잡아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 내가 안온한 일상을 보낼 수 없도록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남긴 흔적들도.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녹온을 1화부터 다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놓친 많은 것들을 다시 붙잡고 싶고, 내가 붙잡았던 많은 것들을 놓아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음악을 들을 때면 과거로 회귀하게 됩니다.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고 책을 읽으면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다시, 제 속옷 속에 들어온 것들을 하나 하나 꺼내 봅니다. 그 전 애인의 음악과 훌라춤과 고양이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아- 나는 결국 이것들에 매여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가 봅니다.
가장 아끼던 음악을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좋아하던 책은 책장 깊숙한 곳에 숨겼고요, 고양이는 짧은 프렌치 키스와 함께 마음속 한 켠에 꼭꼭 숨겨두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나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태초를 상상해 봅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느꼈을 축축함과 뜨뜻미지근한 태반과 나를 꽁꽁 옭아맸을 탯줄 같은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ㅁㅁㅁ.
아직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