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보내요
시류
실종된
아이가 있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대
현수막이라도 걸어야 할까
사라진
친구들
없어진
물건들
거대한 숲. 나무 │ │ │ 는 사라졌다.
그루터기 ㄇ 만 남았다.
다 마신 커피잔엔 버려진 글이 있고
너는 내 글을 먹는다
나는 눅눅해진 음운을 씹으며
칼은 펜을 이기고
우리는 시류에 편승해야 할 때
우리의 그루터기는 어디로 갔나
숲은 사라졌다 숲은
덩그러니 남은
그루터기 하나
꺾인 가지에도
잎은 피는데
구겨진 새싹은 펴질 기미가 안 보인다
벌레가 날 갉아먹을 테지
앙상한 가지가 머리를 쓴다
있기 마련인 끝에서
펜촉으로 숲을 겨냥하며
글을 쓴다 칼을 쥔다
나의 칼은 글이다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는 글을 쓴다
이 시는 제가 교내 한 수업을 들으며 느꼈던 생각과 들었던 감정을 바탕으로 쓴 시입니다. 문학과 연계한 학과의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학생들, 본인은 성적을 바탕으로 이 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느낀 안타까움과 절망감이 주된 정서입니다. 더 이상 문학을 읽지 않는 시대의 흐름과 풍조. 맞춤법을 틀리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는 세대. 책을 읽지 않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시대.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나’는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친구는 이 시를 읽고 저에게 선민 의식이 드러나는 글이라며 어디에 낼 생각이라면 말리고 싶다고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시를 대산대학문학상 공모에 지원하며 – 어찌 되었든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의 근간이 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담겨 있는 시이기 때문에 선민의식으로 생각되든, 혹은 그저 문학 비전공생의 삐뚤어진 마음가짐으로 보이든 간에 어디든 내보이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지 못해 손가락이 안달 난 요즘입니다. 딱히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으면서 우선 워드프로세서를 키고 노트를 펼치고 만년필을 뽑아 듭니다. 그리고 한 두어 줄 적다가 다시 노트를 덮고 노트북을 꺼 버리고 맙니다. 다시 책을 읽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것은 유선혜 작가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공유하고 싶은 시가 있어 한 자 한 자 따라 적어봅니다.
삶에 대해 자꾸 논하고 싶은 게 제가 걸린 병이에요. 잘못된 선택이 모이면 그 인생은 대체로 슬퍼집니다. 제일 슬픈 일은, 자신이 슬픈 줄도 모르는 거예요. 가끔씩 빌라 입구에 나와 사료를 주는 인간이 자기 부모인 줄 알고 살아가는 고아가 된 짐승처럼요. 자려고 누우면 괄호 쳐버린 많은 일이 떠오릅니다. 일찍 자기. 아침에 일어나기. 적당히 먹기. 적당히 근육과 관절을 움직이고 적당히 울기. 매일 머리를 감고 하루에 30분 이상은 햇볕을 쬐기. 어제는 머리가 간지러워서 잠에서 깼어요. 두피에 난 상처를 박박 긁다가 손톱 밑에 피가 꼈어요. 딱지가 지면 바로 뜯어버렸어요. 가여운 딱지. 머리에 구멍이 났어요. 제가 키우는 귀여운 구멍이랍니다. 조금 더 커지면 야옹 하고 울지도 몰라요. 참을 수 없어서 머리를 감았습니다. 샴푸를 눌러 짜서 거품을 내기 위해 팔에 힘을 주는 일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어요. 머리카락이 빠져서 수챗구멍을 막았습니다. 그래요, 아무 데나 괄호를 쳐서는 안 되죠. 적당히 쳐야 해요. 괄호 쳐야 하는 것은, 가령 세계의 의미나 인생의 허무에 대한 과도한 망상 같은 것. 내가 사실은 두 발이 변색된 인형이라거나 밤하늘이 흰색 콘크리트 벽에 큰 빔 프로젝터로 쏜 그림자라거나 우리 외할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 있어서 내 소식을 몰래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들은 머릿속의 구멍을 점점 크게 만듭니다. 딱지가 질 시간도 안 주고. 쥐약을 잘못 주워 먹고 죽어가는 고양잇과 생물처럼, 궤양이 생기고 마는 그것들의 위처럼, 경련을 잠시 일으키다 이내 가만히 있습니다. 쥐가 아닌 생물을 위해 쥐약을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뭐든 입에 넣고 보는 선택이 우리를 슬퍼지게 만드는 거겠지요.
- 유선혜,「괄호가 사랑하는 구멍」 ,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우리 집엔 고아가 된 짐승이 나를 어미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나는 엄마가 아니라 누나란다’고 아무리 얘기해 주어도 이 짐승은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듯 합니다. 계속 엄마, 엄마 하고 나를 부릅니다. 잠시 담배라도 필 요령으로 집을 벗어나면 집이 떠나가라 엄마, 엄마 불러 댑니다. 그럼 나는 피려던 담배도 다시 집어넣고 후다닥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은 배를 뒤집어 까며 나를 맞이합니다. 그 짐승의 이름은 춘식입니다.
봄 춘, 자를 써서 춘식입니다.
그 짐승은 나의 봄입니다.
* * *
얼마 전, 황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선물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편지를 썼습니다. 황은 나에게, 나는 황에게. 나는 황에게 잘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은영의 표현을 빌려다 썼습니다. 아래 전문을 인용합니다.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과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이
솟아나는 저녁이 잘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나에게는 빈 새장이 어울린다
피에 젖은 오후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이
- 진은영,「어울린다」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이후론 편지 쓸 일이 잦았습니다. 함께 1년을 동고동락했던 사랑하는 언니의 생일을 맞아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곁에 내가 함께 있음을, 그리고 당신의 상처가 결국은 아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래와 같은 시를 인용했습니다.
나는 네 흉터를 오래 바라보았다
충분히 아물었지만 조금 더 진전이 있어야 할 것 같은 둥근 영역
정확히 그 흉터가 있는 위치에 타투를 새긴 사람이 있었기에
나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며
마주 앉은 시간을 열었다
전과 편육, 냉채와 절편을 사이에 두고
내 앞에 놓인 국에 숟가락을 넣는다
좀 어떠하냐고,
모든 게 나쁘다고,
모든 게 다 좋다는 말보다는 낫다고,
무슨 묵념을 그리 오래했느냐는 질문에 하늘에서 너를 안전하게 지켜달라 빌었다고 답했는데
적의는 전혀 없었으나 행여나 적의로 읽을까 봐 버릇처럼 말끝을 흐렸다
매사에 입술을 열 때마다 애를 써야 한다
선의와 호의를 두 배 세 배 열 배로 담기 위해서
그래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지니까
슬픔을 나누기 위해서 달려왔으나
우리가 나누는 것은 축복일지도 몰랐다
설사 간간이 울먹인다 해도
우리는 띄엄띄엄 대화를 잇는다
너의 뒤쪽에 앉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사라진다
윤곽만 겨우 남은 지난 일화가 손끝에 잡혔다가 바스라져간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일들은 그저 그런 일이었다고
이제는 설령 천사와 싸우게 된다 해도
감당할 수 있다고
테이블 위에 놓인 빈 그릇들 사이가 척력으로
멀리 저 멀리 밀려 나가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
튼튼하고 둥근 올가미를 두 손에 들고서
검고 깊은 볼모로서
- 김소연,「우리의 활동」 , 『촉진하는 밤』
많은 이들에게 편지를 통해 다양한 시를 선물했던 요즘입니다. 그만큼이나 마음을 들여다볼 일이 많았습니다. 들여다본 마음은 구멍이 숭숭... 요란하게 술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떠들썩하게 시끄럽기도 합니다. 마냥 잔잔하지만은 않습니다.
괜히 시를 읽어봅니다. 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시가 어딘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그런 시를 찾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 찾아 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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