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자라지 않아 무슨 맛이 날지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일단 나는 나의 아키라를 작업방에 놔두었다. Akira.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목이자, 나의 일본어 이름이기도 하다. 나의 이름 빛날 빈(彬)자를 일본어 발음으로 바꾸어, 일본에 여행갔을 때부터 나를 아키라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그 외 ‘혜빈’이라는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이름이 외우기 어렵다면 나를 아키라라고 불러’라고 말해왔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이제 나의 분신이 된 셈이다.
대부분의 나무는 햇볕이 드는 자리 아래에 놓아야 잘 자랄 것 같다는 편견에 빠져 있었는데 찾아보니 파키라는 반그늘을 좋아한다고 했다. 작업방은 마침 모니터 환경을 위하여 항상 빛이 반쯤 새는 커튼을 쳐 놓고 있어 다행이었다. 아키라를 내게 선물해 준 쭈는 정기적으로 흙을 만져보며 이 친구가 목이 마른지 마르지 않은지 확인해보고 물을 주라고 했지만 나는 대충 내가 물을 마시다가 아키라가 생각나면 물을 준다. 내가 목이 마르면 너도 목이 마르겠지. 다행히도 어떤 잎도 마르거나 썩는 일 없이 쑥쑥 잘 크고 있다. 때로 적절한 방관은 도움이 된다.
아키라와 함께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의 두 번째 이름을 붙여 준 존재. 항상 생명이 죽어가던 공간인 작업방의 유일한 살아있는 생물. 내가 어떻게 하면 너와 더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겠니, 물을 주며 그런 생각을 한다. 너는 언제쯤 꽃을 피울까. 내가 어엿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면 그때서야 제대로 꽃을 피우고 나를 봐줄까.
아직은 손바닥만한 크기에 불과하지만 네가 언젠가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크게 자랐으면 좋겠다. 내가 너로 인해 한숨지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분갈이라는 것을 해보겠지. 너에게 알맞은 크기의 공간을 새로이 부여하면서 나는 또 어떤 생각을 할까.
*
지난 녹온 9화에서 생존이 투쟁이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생존이라는 말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썼던 것만 같아 지금에 와서야 후회가 밀려온다. 생존이 지닌 가치를 괄시한 것만 같다는 죄책감.
최근에 들어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혹은 타인, 혹은 나, 의 죽음에 관하여 너무 무감각해진 것 같다고.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며, 죽음에 가까운 고통 직전에 주마등은 흘러가지 않았고 나는 이틀간의 기억을 통째로 잃었다. 응급차에 실려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소변줄을 달고 있었고 내 옆에 간호사가 소변줄을 빼지 말라고 경고하는 안내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퇴원 후 6일이라는 긴 날짜가 지나버린 것을 알고 나서야, 알았다.
소변줄이 불편해 자꾸만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간호사가 수 차례 경고를 주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일어나면 구속구를 채워야 한다고. 이미 이전에 병원에 한 차례 입원했을 때 구속복을 입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 말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별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옆으로 몸을 돌아 누웠다.
중환자실은 정말 중환자실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곳곳에서 소독약 냄새가 났고 병마와 싸워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코드블루를 외치는 간호사의 외침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팔목에 꽂혀 있는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도 나는 딱히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소변줄은 언제 뺄 수 있을까, 기저귀는 언제 갈아주는 걸까, 이 생각만 반복했다. 내가 여기서 변을 지리면 냄새가 나겠지. 그럼 정말 쪽팔릴 것 같으니 화장실은 어떻게든 참아야겠다.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고.
건강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저찌 퇴원을 하며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연락을 돌렸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잘 퇴원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내 연락을 받아 주고 나를 염려해주는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집에 돌아오니 고양이가 이불에 변과 오줌을 지려 놓았다. 나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는 표시였다. 지친 몸을 질질 이끌고 변을 치우고 이불을 버리고, 새 요와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고양이는 새침하게 흥, 하는 소리와 함께 내게서 등을 돌렸다.
퇴원 후 한동안은 화병에 걸려 악몽을 매번 꾸고 매일 이유 없이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집 안을 몽유병 환자마냥 돌아다녔다. 나의 불안한 상태를 알아서인지 고양이는 내가 억지로 잠에 들려고 누울 때마다 내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누워서 내 얼굴을 핥아 주었다. 고양이의 화장실을 치워 주며 내가 더 잘할게, 내가 진짜 잘할게 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던 것 같다.
퇴원 수속을 밟고 나서 나를 나의 집으로 데려다주던 길, 아빠가 그런 얘길 했다.
병원에서 연락 왔을 때, 우린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혜빈이 —————했대. / 또? / 경기도 안산의 병원에 입원해있대. 라는 대화를 하고 차를 타고 이동했지. 구급대원에게 부축되어 이동하는 너를 보고 네 이름을 불렀는데 네가 초점 없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더구나.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그냥 웃었다.
*
생존이 지닌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떻게든 내가 살아나길 바라던 불특정 다수의 의료진들과 간병인들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를 걱정하던 친구들의 마음에 대해서도. 그들은 왜, 어떻게, 내가 뭐라고, 나를 그렇게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종착점 없이 여전히 이어져있다. 이 고민은 2년 반 전부터 해오던 터라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은 제하고서라도 연고도 없는 제3자가 진심으로 다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살아내는 것이 이렇게나 힘겹다. 때론 누군가의 기대에 겨워서, 때론 누군가의 애정에 기대서, 때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그러니 생존은 투쟁이 맞다. 그것이 개인적 차원의 투쟁이든 사회적 차원의 투쟁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투사(鬪士)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라는 전쟁터 안에서 승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싸워가는 레지스탕스다. 각자가 자신의, 타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타인의 삶을 지지한다. 연대한다. 그럼에도 살아달라 빌어 준다.
우리는 서로에 의해서 생존한다.
아…. 이제야 답을 조금 찾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