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산다.
이제 스스로조차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삶을 산다.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잦다. 우리가, 여성들이, 소수자들이, 이미 수많은 범죄들을 대상으로 숱하게 분노해온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세상이 바뀔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런데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n십명의 사람들이라는 숫자는 변함이 없을 때, n십 류의 범죄가 이루어지는 공간의 숫자는 그대로일 때, 또 제 2, 3, 4, 5의 n번방들이 생기고 또 새로운 라벨링을 해야 하는 성범죄가 발생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내 친구들과 지인들이 마냥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당장 나의 가까운, 내가 사랑하는 친구조차 성범죄 피해 사실이 있다는 것을 들을 때, 내가 직접 성범죄를 신고했는데 경찰로부터 ‘피해자가 치마를 입고 있었나요?’ 따위의 하급 질문을 받았어야 했을 때,
나는 어릴 때의 나를 마주한다.
중학교 2학년의 나를.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머리를 짧게 잘랐어야만 했던 나를.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든 남자들이 무서웠던 나를.
그 사람을 다시 마주하면,
그 사람이 다시 나를 알아볼까봐,
그 사람이 내게 보복할까봐 무서워 머리를 벅벅 밀고 옷 스타일을 바꾸고 친구들 무리에 섞여 굳이 빙 둘러가는 오솔길을 통한 귀가를 선택하는 나를.
그리고 경찰로부터 ‘체포했습니다’라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나를 마주한다.
나는 그 때 고작 열다섯이었다.
*
신고해도 바뀌는 건 없다는 것을,
경찰들은 이런 일들을 이미 숱하게 겪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이런 일들을 처리한다는 것을,
사실 체포 따위에 진심이지도 않고
나의 진술 따위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미 뼈저린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지?
그럼 나는, 내 친구들은, 내 가족,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은 누가,
………………….
무력감을 느낄 때 나는 심술을 부린다.
그래 오늘도 나는 발에 채이는 눈사람을 걷어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만든 눈사람을 발로 짓뭉개며
그 안일한 안온함을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또 진심으로 치 떨면서.
한여름 밤
트인 시야에 걸리는 눈사람들은 많기도 하다
저것들을 어느 세월에 다 걷어차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