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원나잇이 당신의 첫 경험일 줄이야.
얼마 전 우연히 알고리즘에 뜬 인스타 웹진의 제목이었다.
운영자뿐만이 아니라 구독자로부터 글을 기고받아 간간이 <섹스>를 비롯한 여러 자극적인 이슈로 꾸려져 나가는 해당 웹진의 글들은 하나같이 ‘진솔함’을 무기삼아(절대 이 표현을 수정하고 싶지 않다) 다자이 오사무적 자아에 취한 사람들의 배설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이 표현 또한 절대 수정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주변 지인들의 일부도 이 웹진을 구독하고 있었다.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다양한 웹진과 매거진, 에세이들을 찾아보고 있던 와중, 나는 이 사이트를 발견하자마자 불쾌감에 몸서리치며 핸드폰을 꺼야만 했다. 으.
<자극적인 토픽> 하면 '섹스, 혹은 원나잇'이 자동적으로 입력되어 그와 관련된 글을 '배설'해 내는 족속들이 싫다. 그들의 글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이나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정도의 다짐은 하게 만들 수 있겠다. 요즘 세상은 요지경이라서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러한 토픽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것은 사실이다), 알맹이는 텅 빈 자극적 매체들이 주로 소비되는 시대가 와 버린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 반동으로 아무나 폭력/혐오적인 글을 사회비판칼럼인 양 싸지르고 작가인 척 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겸손함이 미덕이란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고 자기 PR이 판을 치는 세상에 '글 좀 쓸 줄 안다'는 또 하나의 PR용 문구가 되어서 가볍게 소비되고 만다. 마치 입시/취업용 이력서에 한 줄 더 채우려고 들어가는 활동들마냥.
최근 내가 좋아하던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 사생활 무단 인용과 관련하여 문제가 제기된 바가 있다. 개인적으로 정말 관심 있게 책과 기고물들을 찾아보던 사람이었고,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날 밤까지 그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사건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와 관련한 책을 전부 버리고, 불태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고 찌질하게 술을 홀짝이며 그의 책을 다시 읽어봤지만. (그리고 여전히 몇몇 문장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고 그런 내가 너무도 싫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그의 작품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소설가가 아니라 에세이 작가로서 활동하는 것이 더 걸맞는 사람이었다. 그의 글은 난해하다는 평을 많이 받으며-한 문장이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할 때도 있고, 도저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후기도 적지 않다. 그가 스스로 설정한 방대한 세계관에 스스로가 휩쓸려 글이 죽어버린 느낌이랄까. 등단 이후 다작을 하고 있긴 하지만 뚜렷한 행보를 남기고 있지는 못했다.
그는 나의 모교에 강연을 온 적이 있다. 신작을 홍보할 겸, 그리고 자신이 협업을 많이 진행한 출판사와 연계하여 이야깃거리를 조금 들고 온 겸 그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소박하지만 자유로운 젊은 작가의 이미지'를 운 좋게도 강연 내내 고수할 수 있었고 강연을 들은 나는 그가 꽤 호감형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그의 책은 에세이만 읽어 보았지만, 그 강연을 들은 이후로 그의 신작에게 나의 소중한 책장 한 켠을 내주었다. 물론 그 책은 2챕터까지만 읽어 보고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아 읽기를 그만두었다.
사라진
친구들
없어진
물건들
거대한 숲. 나무 │ │ │ 는 사라졌다.
그루터기 ㄇㄇㄇ 만 남았다.
쓰레기통엔 버려진 글이 있고
너는 내 글을 먹는다
나는 눅눅해진 문장을 씹으며
칼은 펜을 이기고
우리는 시류에 편승해야 할 때
우리의 그루터기는 어디로 갔나
숲은 사라졌다 숲은
덩그러니 남은
그루터기 하나
앞서 언급한 두 에피소드를 복기하며 예전에 써 두었던 시를 꺼내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이 시를 쓸 때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텍스트는 도구에서 수단이 되어 버린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글과 나의 위계를 명확히 할 것. 그리고 내 글이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것.
첫 번째 글이 될 뻔한 텍스트의 처음 주제는 <우리는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가> 였다. 아래 삭제된 원고 일부를 인용한다.
글을 쓰기 위해 문예창작동아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받았던 질문이 있다. 모든 글은 글쓴이의 경험에서 기반할 수밖에 없잖아, 그럼 너는 어디까지 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그 때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의 내 생각은 이렇다. 세상 모든 생명체의 경험은 타자-기반적이다. 타자, 혹은 다른 어떠한 물체나 존재 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경험은 없다. 하다못해 하늘이 맑아 기분이 좋아졌다는 경험도 하늘이라는 비-자아적-존재로 인해 생겨난 경험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쓰는 글에는 필수불가결하게 타자가 엮여들어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과의 경험에 기반했냐, 기반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걷어냈느냐다. 대상이 허락을 구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허가를 받아야 하고(마치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you, next’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허락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가공하고, 깎아 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폭력이 목적이 아닌 이상 모든 창작물은 창작자뿐만이 아니라 창작물에 필연적으로 언급될 수밖에 없는 타자의 권리까지 보장해야 한다. 돌이나 하늘에까지 의견을 구할 필요는 없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이 어디까지 자신의 영역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입원 이야기를 글로 쓰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입원 과정과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최대한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했다. 그런 ‘가감없음’을 이용해서 무엇을 꾀하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거창하게 ‘부정적인 기억을 내려놓기 위한 과정이다’고 정당화했지만 다시 보니 그저 배설이었다. 나의 힘들었던 경험을 함께 나누자는 명목으로 남에게 뿌렸던 폭력의 흔적. (물론 다행히도, 그 누구에게도 그 글을 공유한 적이 없다 / (+) 이 글을 쓰는 와중에 그 때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형편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창작물들이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싶다. 누군가를 엿 먹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예술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글이 되었든, 이미지가 되었든, 조각이 되었든, 그 어떤 형태를 띄었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예술이 항상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것은 이상적인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어떤 형태로든 개인의 경험을 표현하고, 그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나의 입원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나 자신을 치유하고, 그 과정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내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진정성이 왜곡되거나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다. 내가 쓴 글이 형편없다고 느꼈던 이유는 그 글이 나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목적보다는 타인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더 크게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단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존재와 실존의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심지어 자아를 포함하여) 창조하며, 이 과정에서 말과 글은 우리의 실존적 투쟁의 도구가 된다.
글이 점차 철학적이며 사회비판적으로 흘러가기에 쓰는 걸 멈추고 글을 지웠다. 내가 [녹온]을 진행하며 지향했던 글의 방향성은 이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쓰면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여러분과 논의할 수 있는 바가 뚜렷한 글을 쓰고 싶었다. 단순히 내가 세상은 썩었어! 종이책은 곧 전부 e-book으로 대체되어버릴 것이고 편집디자인으로 드러낼 수 있는 종이책만의 특장점과 아름다움은 이내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점차 아름다움이 사라져가는 세상이 되겠지. 영혼을 충만케 하는 예술과 인문은 뒷전이 될 테고 이제 세상은 세상이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될 거야. 자본주의 시장에서 태어나버린 우리는 이제 모두가 예상했고, 예상했기에 우려하였던 순수의 종말로 갈 테다. 식의 한탄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에디터를 희망하며 수강했던 강의에서 그런 말을 했다. 출판시장은 이제 '사람들이 무얼 읽고 싶을까?'이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얼 사고 싶을까?'에 답이 되는 책을 만든다고. 책 표지들에 디자인적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순문학과 에세이, 비평문, 인터뷰집을 가리지 않고 책들의 인상이 사뭇 비슷해진 것은 이러한 출판시장의 변화를 따라간 결과라고.
누군가는 아직도 펜이 칼을 이긴다고 하지만 나는 (친구의 말을 빌려) 이제는 칼이 펜을 이기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 칼날의 형태는 다양하다. 때로는 자본주의 시장의 형태를 띄고 때로는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따라가기도 하며 때로는 권력의 형태를 띄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날카롭고 무자비하게 펜을 쥔 사람을 겨눈다. 시대에 맞는 글을 쓰라고.
숲은 어디로 갔나.
그루터기에 주저앉아 한 때 풍성했던 숲을 그린다. 그래도 나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고 싶기에 글을 쓴다. 녹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기소개가 길었다.
부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담이 되지 않는 글이 되었기를 바라며 이만 마친다.